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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차23 2026. 3. 13. 14:16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명회는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그는 말년에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다. 한명회는 과연 말년을 갈매기와 함께 보내려고 했을까?

칠삭동이로 태어나 권력의 최정상에 우뚝 서다
당시 훈구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한명회가 1487년(성종 18년) 사망한 직후 그에 대해 사관들의 기록한 졸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 하였으나, 접대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 때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정 관원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 과연 그의 부와 권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명회는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고, 더하여 우의정을 비롯해 영의정까지 당대 최고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세조와는 사돈간이면서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었으니, 그 위세는 충분히 짐작된다.

한명회는 잉태된 지 7달 만에 태어나, 어려서는 사지가 완전치 못했는데, 차츰 장성하면서 체구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커지고, 또 지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젊었을 때에 절에서 글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산골짝을 가는데 범이 그를 호위하고 갔다. 공이 이르기를, “멀리까지 와서 보내 주니 족히 후의를 알 수 있네.” 하였더니 범이 마치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듯이 하더니 날이 밝을 무렵에야 갔다. 또 한 번은 그가 영통사란 절에 들러 머무른 일이 있었다. 그때 늙은 중 한 사람이 그의 상을 훑어보고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의 머리 위에는 혁혁한 기운이 있어서,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되겠소. 그리고 명년에는 지기(知己)를 얻게 될 거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크게 기뻐하고는, 바로 발걸음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책사와 장정들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얻어들었기 때문으로, 이미 수양대군 측에 들어가 있던 친구인 권람을 찾아갔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명회는 개성의 경덕궁직을 지내던 한미한 관원이었다. 이때 한명회와 관련되어 이른바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그가 개성의 경덕궁직으로 있을 때, 명절을 맞이하여 개성에 있던 관원들이 만월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모두 술이 흥건히 취한 가운데 참석했던 사람을 중심으로 계를 조직하여 우정을 돈독히 하자고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때 한명회도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그 자리에서 멸시와 비웃음을 받고 말았다.그러나 바로 이듬해에 그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시켜 원훈(元勳)이 되자, 당시 계원들이 비로소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세속에서 세력을 끼고 남을 멸시하는 자를 사람들이 ‘송도계원’이라 지목하였다고 한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고 했던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네 인간사의 얄팍함을 야유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권력이나 자본에 아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